2025. 7. 9. 21:22ㆍ뇌 호르몬
기억은 사실보다 감정을 더 저장한다
기억은 마치 영상처럼 정확하게 저장되고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상황의 영향을 받는 역동적인 구성물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그 사건의 순서나 구체적인 말보다, 당시의 감정 상태와 함께 저장된 심상을 더 오래, 더 강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뇌 속에서는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가 강한 감정 자극이 있을 때 특히 활발해지며,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hippocampus)에 신호를 보내 저장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만든다. 이때 스트레스나 공포, 슬픔, 분노처럼 강렬한 감정이 개입되면, 관련 정보는 평범한 사건보다 더 깊이 각인되지만 그 정확도는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감정은 기억의 저장과 회상에 필터처럼 작용하며, 뇌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를 중심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잊혀지지 않는다’기보다는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해석을 배제한 채 기억이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즉, 기억은 지워지지 않기보다는 감정의 흔적을 타고 지속적으로 떠오르며, 이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되기도 한다.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왜곡된 기억의 두 조력자
감정이 기억을 왜곡하는 데에는 도파민(dopamine)과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이라는 뇌 호르몬이 깊이 관여한다. 도파민은 뇌의 보상 시스템과 연결된 호르몬으로, 즐거움이나 보상 기대와 관련된 경험을 더 강하게 기억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1등을 했을 때의 성취감이나 첫사랑의 설렘은 도파민 분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도파민은 때때로 기억의 선택적 미화나 과잉 일반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반면, 노르에피네프린은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호르몬으로, 위기 상황이나 공포 자극에 노출되었을 때 분비가 급증하여 생존과 관련된 정보를 뇌에 강하게 각인시킨다. 문제는 이 호르몬이 기억의 세부 사항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위협 상황에서 노르에피네프린이 많이 분비되면, 뇌는 해당 순간을 ‘과장된 위협’으로 기억하고, 이후 유사한 상황에서도 과도하게 불안하거나 회피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도파민은 긍정적인 기억을 이상화시키고, 노르에피네프린은 부정적인 기억을 확대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함으로써 우리 기억은 사실이 아닌 감정의 강화 버전으로 저장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왜곡되는 기억의 구조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정확성이 떨어지고 감정에 기반한 재구성이 늘어난다. 인간의 기억은 저장 후에도 계속해서 변형되며, 회상할 때마다 뇌는 과거 정보를 현재의 감정, 맥락, 가치관에 맞춰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세로토닌(serotonin)과 같은 기분 조절 호르몬이 개입한다. 세로토닌은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고 우울이나 불안 등을 조절하는 데 중요하지만, 우울한 기분 상태에서는 과거 기억을 더 부정적으로 회상하게 만들 수 있다. 즉, 동일한 사건이라도 기분이 좋은 날과 나쁜 날에 회상했을 때 내용의 해석과 감정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멜라토닌(melatonin)이 수면 중 뇌에서 기억을 재처리하고 통합할 때, 감정적으로 중요한 기억이 더 오래 보존되며, 반대로 덜 중요하거나 평범한 정보는 빠르게 삭제되거나 흐려진다. 문제는 이런 뇌의 선별 과정이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감정적 강도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일수록 사실보다는 현재의 감정 상태와 결합한 재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왜곡된 기억이 형성되기도 한다.
기억의 왜곡을 줄이고 정서적 균형을 잡는 방법
기억의 왜곡은 자연스러운 뇌의 작동 방식이지만, 이로 인해 일상에서 불안, 후회, 부정적 감정에 시달릴 수도 있다. 따라서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기억을 감정과 분리하여 바라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자기기록(저널링)이다.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고, 감정과 해석을 분리하여 기록함으로써 시간이 지나 기억이 재구성되더라도 사실 기반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또한 마음챙김 명상이나 인지 재구성 훈련을 통해 현재의 감정을 조절함으로써 과거 기억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줄일 수 있다. 감정이 격할수록 기억은 더 비논리적으로 저장되므로, 감정 반응을 조절하는 훈련은 곧 기억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생화학적 접근으로는 세로토닌과 도파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규칙적인 수면, 식사, 운동을 실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특히 햇빛 노출과 트립토판 섭취는 세로토닌 생성에 영향을 주며, 이는 전반적인 감정 안정과 긍정적 기억 회상에 기여한다. 결국 기억이란 단순한 저장소가 아닌 현재의 나와 계속 상호작용하며 재구성되는 생물학적 이야기이다. 감정 호르몬의 작용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왜 어떤 기억은 고통스럽게 반복되고, 또 어떤 기억은 부풀려지거나 잊혀지는지를 이해하고, 더 건강한 기억 회로를 만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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